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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2 함성호_오지않네, 모든 것들 3

오지 않네, 모든 것들

함성호


나 은행나무 그늘 아래서
142번 서울대-수색 버스를 기다리네
어떤 날은 나 가지를 잘리운
버즘나무 그늘 아래서 72-1번 연신내행
버스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그녀의 집에 가는 542번 심야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린 적도 있네
앙상한 가로수의 은밀한 상처들을 세며
때로는 선릉 가는 772번 버스를
수없는 노래로 기다리기도 하네
그러다 기다림의 유혹에 꿈처럼
143번 버스나 205-1번 혜화동 가는 버스를
생으로 보내버리기도 하고
눈 오는 마포대교를 걸어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나 실연의 시를 적기도 했다네
어느 한 날은 205번 버스나 50-1번 좌석버스를
깊은 설레임으로 기다린 적도 있었지만
그 짧은 연애를 끝으로 눈 내리는 날에서
꽃 피는 날까지
그런 것들은 쉽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네
패배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들, 이를테면
성남에서 영등포까지, 홍등이 켜진 춘천역 앞으로
지나던 그 희미한 버스들을 이제 나는 잊었네
나 푸른 비닐우산의 그림자 안에서
기다림의 끝보다
새로운 기다림 속에 서 있음을 알겠네
오늘도 나 147번 화전 가는 버스나 133-2번 모래네 가는
버스를 기다리네
이제는 더 이상 부를 노래도 없고
어느 누구도 나의 기다림을 알지 못하네
오지 않네, 모든 것들
강을 넘어가는 길은 멀고
날은 춥고, 나는 어둡네


함성호, 『성(聖) 타즈마할』, 문학과 지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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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늘 버스를 기다린다. 주로 홍대 앞에서 광화문을 지나는 273번을 기다리거나, 상수역과 회현을 이어주는 7011번을 기다린다. 추위속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독스럽다. 요즘에는 버스정류장 곳곳에 버스도착알림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어서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지금 어디쯤 와있다는걸, 4분뒤면 내가 서 있는 곳에 올거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시설이 갖춰진 정류장에서는 나는 그저 곧 도착할 버스를 기다리고 섰을 뿐이다. 너무 추울 때면, 기다림이 너무 길어질 때면 사실 그렇게 알려주는게 고맙다. 특히 아리까리한 막차 시간대에 일말의 희망을 갖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이제 오지 않을 버스라면 더욱 그렇다. "273번, 운행종료"...  오지 않을 것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이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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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무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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