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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07 심보선_슬픔이 없는 십오 초

p.58

둘_심보선

두 줄기의 햇빛
두 갈래의 시간
두 편의 꿈
두 번의 돌아봄
두 감정
두 사람
두 단계
두 방향
두 가지 사건만이 있다
하나는 가능성
다른 하나는 무(無)


p.32

아내의 마술_심보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 버리자
미망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p.13

식후에 이별하다_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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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
시를 쓴다는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발가벗는 일인 것 같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고 할 만큼 지독스럽게도 쉼없는 슬픔으로 점철된 글이다. 식탁 모서리를 오래 쓰다듬는 행동은 왜 슬픔의 이미지와 직결되는것일까. 정말 슬픈 행동이다.

***
이 시집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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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와 구입종용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18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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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무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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