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사는 여자가 복도에서 통화중이다. 들으려고 들은 것이 아니라 귀에 들리는 말이 다음달에 이사를 가는 모양이다. 옆집 여자가 이사를 간다는데 왜 갑자기 나는 문득 서글픈 마음이 드는걸까. 나도 그렇고 옆집 여자도 그렇고 이집 저집 옮겨다니며 살고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도 그랬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개 20대 후반 30대 초반으로 특히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어서 자기 나라를 떠나 이곳 저곳에서 살아본 경험이 많았고, '내 나라''내 집''내 것'이라는 개념이 강하지 않고 유연했다. 다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기 저기 옮겨다니며 살고있었다.
처음 만난 내게 집 키를 주며 편하게 아무때고 집을 오고갈 수 있게 해주는가 하면, 집을 비우고 여행을 가는데도 내게 남은 날 동안 집을 맡겼다. 나를 너무 믿는거 아니니, 생각해보니 나도 내 게스트에게 그렇게 했었다. 의심할 사람이면 애초에 받아들이지도 않았을거고,,, 실은 집에 쟁여둔 것이 없어 잃을 것이 없다.
파리에서 나를 맞아준 호스트는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함께 사는 연인으로, 세느강 아래 작은 집에서 사는 전형적인 파리지엥이었다. 내가 온 첫날에는 동네 펍에서 맥주를 마시자기에 따라나갔다. 동네사람들로 북적이는 그 펍은 여행책자에는 소개되지도 않은 동네 펍으로 까만머리에 노란 얼굴은 나 혼자였다. 굳이 그리 나누고 싶지 않지만 순간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펍을 나와 허기를 달래려고 에스카르고를 먹으러 가는 길에(내가 달팽이 먹고싶다고 했다) 어떤 집 앞에 멈춰서더니 아랫입술을 모아 '휘' 바람소리를 내서 친구를 불러냈다. 창가에서 휘파람을 불다니, 젠장, 장면마다 영화같다!
맛집은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건 어디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구석탱이에 위치한 그 에스카르고 집도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한국에서 돼지국밥집마냥 엄청나게 저렴했다. 달팽이 한판에 한화로 만원 정도 했다.
하루는 남동생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는데 같이 가자고 초대를 해주었다. 나도 뭔가 선물을 가져가야할 것 같아 동네 유기농 가게에서 잼 두병을 샀다. 포장도 예쁘게 해줘서 아주 흡족했다. 얘들은 도무지 전철이나 버스를 타지 않고 걷거나 자전거를 탔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파리 공공 자전거를 빌려타고 동생 집으로 향했다.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했던 날이다. 저녁 7시를 넘은 시간, 빗속에서 15분여를 달려서 동생집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는 도로 가에서 셋이 일렬로 달리는데 나를 두번째에 놓고 가는 배려를 해주어 고마웠다.
이 날 이후 나는 파리의 공공 자전거(velib) 시스템에 반해 파리에 머무는 동안은 내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왠만한 모든 전철역/버스정류장 마다 있다. 타고 이동하다가 다른 정류장의 velib자전거 파킹랏에 주차해도 된다. 자전거 주차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분실 시에는 카드에서 자전거값 150유로 정도가 자동으로 빠져나간다. 주차할 때 OK사인 확인만 잘하면 문제 없다. 아침 저녁으로 많은 직장인들이 정장을 입고 집단으로 velib를 타는데 출퇴근 풍경이 훈훈했다. 서울시에서도 올해 11월부터 공공자전거 시범운영 시작했다는 기사를 봤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오세훈 시장이 캐나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갔다가 벤치마킹 한 것 같다. 서울은 자전거를 위한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한데다 서울의 격한 자동차 운전자와 함께 같은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기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민들 반응을 보며 전 지역으로 확대 운영 한다니(현재는 우선 여의도,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 등 몇 몇 곳에서 시범운영 중) 격하게 반응을 보여야만 하겠다. 자전거타기엔 좀 추운 계절이긴 하다. (서울의 공공자전거 정보 www.bikeseoul.com )
파리 공공자전거 velib,
동생이 필름을 전공했다더니 집 한 쪽 벽이 모두 DVD로 채워져있었다. 찬찬히 훑으니 한국 영화도 몇편 있다.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 봉준호, 박찬욱. 초대 받은 사람들이 다 모이니 호스트 포함 열명쯤 됐는데, 모두가 한국영화를 잘 알고 있었고 좋아했다. 그들은 내가 사우스코리아에서 왔다는걸 알고 첫번째로 북한의 다음 지도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더불어 '삼성'은 빠지지 않는 고전적인 화제... 자기집에 있는 모든 가전제품이 삼성이라며 한국에 관련한 것이라면 뭐든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이 친구들 말고도 길에서, 버스에서 만나 대화를 튼 사람들은 모두 내가 사우스코리아에서 왔다는 말 다음에는 바로 하나같이 북한의 다음 정권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마치 내가 한국에서 왔기때문에 자기네들이 프랑스에서 뉴스를 통해 얻은 정보 외에 비밀스런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북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별다른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미안했다. 다들 북한에 대한 관심이 생각 이상으로 크다. 심지어 그날 그 친구가 받은 생일 선물 중 하나는 북한에 관한 만화책이었다. 프렌치 캐내디언 Delisle라는 카투니스트가 평양에 방문한 경험을 만화로 그려낸 책이란다. 이 책은 이날 생일파티에서 알게되어 검색해봤는데, 한국에서도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적이 있었지만 초판을 마지막으로 절판되었다. 아마존같은 인터넷 서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나도 위시리스트에 이 책을 올렸다.
나를 대화에서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모두 영어를 사용해주었는데, 서로 영어로 대화해본 적이 이전에는 없었는지 영어를 쓰는 것을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했다. " 어이구 영어 잘하는구만 왜그래~계속해~" 뭐 이런 뉘앙스. 만나고 헤어질 때는 비쥬를 두번 하는 사람도 있고 세번 하는 사람도 있기에 왜 사람마다 인사가 다르냐고 물었더니, 지역 차이일 뿐이란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딩굴거리다가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가 마구 불어를 쏟아내는 '미스 앤 미세스 스미스'를 보다가 잤다. 채널을 다 돌려봐도 자막을 쓰지않고 죄다 더빙이다. 모국어를 정말 사랑하나보다.